< 두봉 칼럼 >

THINKING / 박현우 기자 / 2017-10-05 15:19:33

 

<항생제의 위력> 

 

우리나라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어느 집이나 ‘이명래 고약’과 ‘빨간약’(머큐럼)이 비상약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기침환자에게는 ‘용각산’이라는 가루약이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항생제가 치료제로 사용되기 시작한 1944년 이전에는 어느 나라건 전통적 의약품과 치료방법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병원균의 노출에 취약하여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매우 작은 상처로도 패혈증으로 생명을 잃는 사례가 빈발 했습니다.  

 

1940년 알랙산더라는 영국의 한 경찰관은 장미가시에 얼굴을 스친 상처로 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찰과상이나 종기로 인해 죽는다고 하면 정신병자로 취급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생제의 발견 이전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민간인은 물론이고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전쟁의 부상으로 속절없이 인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지켜 볼 수밖에 없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스코틀랜드의 생물학자 Alexander Fleming은 박테리아에 관한 연구에 몰입하게 되었으나 사실 그 당시로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방법이 없었습니다.  

 

1928년 어느 날 휴가에서 돌아온 Fleming은 연구실 배양접시 중 하나에서 푸른곰팡이 주변이 깨끗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Fleming은 사실규명에 돌입했고 푸른곰팡이 Penicillium의 분비물인 Penicillin의 작용이 다른 곰팡이류를 사멸 한다는 사실을 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Penicillium에서 Penicillin을 효과적으로 추출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 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Penicillin 제조에 경쟁적 연구를 진행 했고 Penicillin 발견 10여년 후인 1939년에 이르러서야 소량의 항생제 Penicillin을 분리하기 시작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Penicillin을 대량생산하기 시작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미국 전시생산국에서는 대량의 Penicillin을 확보하였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한 결과 부상병들의 회복과 생명유지에 혁혁한 공헌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속절없이 죽어가던 부상병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치료 하고 싶어 하던 Alexander Fleming의 염원이 실현되는, 더 나아가 인류의 생명연장에 지대한 공헌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일이 정도를 넘어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듯이 항생제의 오남용은 지구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가금류와 어류 등의 잔류 항생제,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독성 피해의 증가, 이뿐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인체의 손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보검들을 어떻게 사용 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의 미래와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ssk37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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